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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자존심이 센 사람들에 대한 고찰

제가 눈팅만 하는 카페가 있어요.

정회원이상 되어야 글도 쓰고 댓글도 있는 곳인데 10여년 전에 가입만 했다가 올해 

 글도 올리고 댓글도 달고 하다가 저하고 맞다는 생각이 들어서 탈퇴를 했죠.

 

그러다가 최근에 다시 카페에 다시 가입을 했어요

정회원 신청은 안하고 눈팅만 요량으로 준회원에 머물러 있네요.

카페 게시판이 저하고 맞긴 하지만 비슷한 연령대의 미혼들인 사람들이 주로 활동하는 게시판이라 또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해서요.


그러다가 가지 패턴을 발견했는데 가지인 자존심 대해서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저는 업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면 돌아오는 길에 만남에서 내가 만족스러웠나를 생각하는 편인데요.

만족스러웠다면 아뿔싸 하고 다음 만남에서는 조금 만족스러워야지하고 생각하고요.

뭔가 불만족스러운 면이 있었다고 생각되면 오늘의 만남은 성공적이었군하고 생각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제가 만족스러운 면이 많았다는 것은 상대방은 불만족스러운 면이 많았다는 말이거든요가족이나 친한 친구사이를 빼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거의 이랬었죠.

 

외국에서 실험이 있는데요.

개의 분리된 방에 책상 하나씩 있고 책상 위에는 전선 가닥씩과 1부터 10까지 단계를 

조절할 있는 스위치가 하나씩 있어요


전선과 스위치는 다른 방의 전선과 스위치에 교차로 연결되어 있어서 한쪽 방에서 

스위치를 누르면 다른 방의 전선으로 전류가 흐를 있게 되어 있습니다.


지원자들을 각각의 안에 있는 책상 앞에 앉혀놓고 전선 한가닥을 손에 연결하고 다른 손은 스위치를 조절할 있게 해둡니다


이렇게 하면 이쪽 방에 있는 지원자가 스위치를 누르면 건너편 방에 있는 지원자가 자신의 손에 연결되어 있는 전선을 통하여 흐르는 전류를 느낄 있게 됩니다.

 

그런 다음 단계에서 전류의 강도를 있게 하기 위해 방에 있는 지원자 서로에게 

번갈아가며 전류를 조절하는 스위치를 누르게 합니다


1부터 10단계까지 마친 다음 실험은 시작됩니다.


먼저 방에 있는 지원자에게 1단계부터 10단계 아무 단계나 단계 골라서 건너편 방에 

있는 지원자에게 전류를 보내라고 합니다


그런 다음 건너편 방에 있는 지원자에게 전선이 연결된 손을 통해 느낀 전류의 강도만큼 

반대편 방의 지원자에게 전류를 보내라고 합니다


지원자들의 수가 끝날 때까지 실험은 이런 식으로 계속 됩니다.

 

실험이 끝나고 결과를 토대로 작성한 통계를 보니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지원자 모두 자신이 받은 전류보다 강도의 전류를 상대 지원자에게 보내더란 것입니다.


실험이 시사하는 바는 전류를 스트레스로 바꿔 말한다면 자신이 받는 것보다

스트레스를 상대방에게 전달한다는 것입니다.


실험은 저에게 다음과 같은 생각들을 있는 토대를 제공해주었습니다.

 

먼저 자존심 자존감 차이를 있게 해주었고


자존심이 사람이 

1. 타인과 원만한 관계를 이룰 수 없는지

2. 남과 자신을 대할 이중적인 잣대를 갖게 되는지

3.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떨어지는지

4. 완벽주의자가 되는지

5. 소올메이트, , 지란지교에 집착하는지를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존심 사람이 그렇게 근본적인 이유가 사람의 어릴 부모의 양육 방식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먼저 자존심 자존감 차이를 보겠습니다.


단어는 생김새가 비슷해서 본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 단어이지만 

최근들어 혼동되게 쓰이고 있는 것이 종종 보입니다.


자존감이란 자아존중감의 줄임말인데 자신이 바라보는 자신을 뜻합니다

더하고 것도 없이 자체로 완전한 것이지만 보통 유아기 부모의 양육방식에 따라 결정되고 

나이가 듦에 따라 확장되는 인간 관계 속에서 확정되어 갑니다.


자존심 다른 말로 프로이트의 말을 빌려 에고(ego)라고 합니다. 내면의 아이라고도 합니다.

 

본래의 자존감 100이라고 한다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신의 자존감 100 미치고 모자란 부분을 자존심으로 채우는 양상인데요


자존심 채우는 공간이 크면 클수록 사람을 포함해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괴롭습니다.

 

정량화할 수는 없지만 편의상 자신의 자존감 70이라고 생각해서 자존심으로 나머지 30 채우고 있는 사람의 경우를 보면


자신이 바라보는 자신은 자존감(70)+자존심(30)=100입니다

근데 타인이 바라보는 자신은 70입니다.


사람은 개개인의 인식체계 안에 종속될 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사고방식의 기준은 자신입니다.


사람은 자신을 100으로 보이고 싶기 때문에 타인에게 뭔가를 요구할 때도 100 요구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사람은 자신이 70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타인에게는 100으로 보이고 싶을 뿐이죠.


그래서 자신에 대해서 기준을 정할 때는 70으로 하고 타인에 대해서 기준을 정할 때는 100으로 하는 이중적인 행태를 보이는 것입니다


30 타인에게 들키면 자신은 원래 70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에 30 지키기 위해 완벽주의자가 밖에 없습니다.

 

자존심 사람들의 경우 주위 사람들을 통제하려는 욕구가 강한 것을 많이 봤습니다. 


구체적으로 이런 방식을 고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의 성향을 투영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생각하고 움직여주길 바라는데 사람은 기본적으로 개별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럴듯한 동기를 제공해주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방식에 동참하지 않습니다.


자존심 사람들은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사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정도의 차이지만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는 같지만 자존심 사람들의 경우엔 지나친 감이 있습니다-자존심 사람으로부터 요청되는 방식은 시작부터 유쾌하지 않습니다.

 

자존감 거울에 비유한다면 자존심 거울에 얼룩과 같다고 있습니다.

거울에 얼룩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물을 온전히 비춰내지 못하기 때문에 

인식체계에 헛점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거나 뭔가 새로운 것을 접했을 때도 얼룩때문에 온전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결과가 생깁니다.


만나는 사람이나 처한 환경만 달라질 처음에 사람이 겪고 있는 문제는 반복됩니다.

 

자존심 사람들이 그렇게 되는 경우는 유아기적 부모의 양육방식에 달려 있다고 보는데요.

예전에는 아기가 백지 상태로 태어나서 아기를 둘러싼 환경적인 요인에 의해 성격이나 기질이 

결정된다고 믿었지만 요즘 학계에서는 다른 가설이 받아들여지는 중인 같습니다.


그것은 아기가 이미 DNA속에 앞으로 세상을 살아갈 방법이 프로그래밍된 상태로 태어나는  

같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 활동의 80%이상이 체온유지와 DNA 입력되는 코드의 수정이라고 하는데요.

아기는 부모의 DNA 물려받고 부모는 이전에 부모로부터 DNA 물려받은 상태입니다.


이것을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성경에서 말하는 아담과 이브가 최초 DNA 제공자가 것입니다이른바 원죄가 되는 것이죠.


저는 무교이고 엄밀히 말하자면 종교관은 불교에 가깝다 있지만 상징과 비유로 이루어진 성경에 많이 공감하는 편입니다.

 

아무튼 아기가 가지고 있는 DNA 아기가 속한 가문에 대물림 되어 생존 정보의 축적판이라고 있는데 최근에 생긴 후생학이란 분야에 따르면 조부, 조모가 경험한 충격적인 사건들로부터 수정된 DNA정보가 2대째 후의 자손에게 바로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호르몬과 밀접한 영향을 가지고 있는데요

DNA 호르몬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므로 실제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자발적으로 일으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있습니다.


비자발적으로 생기는 감정을 대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후술하겠습니다.

 

아기는 이미 자신의 기질과 성격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하면 부모의 역할은 그것이 어떤 것인지 빨리 알아내어 그에 맞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문제는 여기서부터 출발합니다.


자존심 사람들은 아기가 가진 기질과 성격을 파악하고 거기에 맞춰 양육방식을 정하는 대신 

아기의 기질과 성격을 자신들이 정하려고 합니다

아기를 통제하려는 것이죠.

 

아기가 자라서 자아를 인지할 나이가 되면서부터 상황은 악화됩니다.

 

상황이 악화되는 과정을 지켜보기 전에 산모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시작해서 아기의 성장 과정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할 같습니다.


배아기 때부터 아기의 성장 과정은 보면 볼수록 신기합니다.

모든 아기는 배아기 여성이었다가 테스토스테론에 노출된 양에 따라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됩니다.

이후 몸의 기관이 순차적으로 만들어지는데요.


연구 결과에 따르면 임신 초기 개월이 아기의 평생 건강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시기라고 합니다.

장기들이 틀을 잡는 시기이니 당연한 연구 결과겠지요

임신 초기에 임산부의 영양 상태가 중요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임산부는 태아와 신체적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상태이니 시기에 남편의 역할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임신 6개월에 접어들면 태아의 대뇌에 주름이 잡히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대뇌에 주름이 잡히는 것은 대뇌의 표면적을 넓히기 위해서이니 시기에 태아의 대뇌로 

정보의 주입이 급격해지는 것을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산모에게서 대부분 감정적인 정보가 주입되었다면 시기부터는 

언어적인 정보의 주입이 가능해지는 같습니다

이때부터는 동화를 읽어주거나 태아에게 직접 말을 거는 등의 행위가 효과적일 것입니다

그러니 산모와 남편은 시기부터는 가는 말과 오는 말에 특히 주의해야 같습니다.

태아의 뇌에 밑그림이 그려지는 단계에 돌입했는데 이상한 그림을 그릴 수는 없으니까요.

 

저는 아기가 태어나면 거꾸로 들어올려서 아기의 기도에 있는 양수를 빼내기 위해 엉덩이를 때리는 과정이 있다는 것이 불만입니다

안락한 세상에서 벗어나 고통을 겪으며 환한 빛때문에 눈도 뜨겠는 바깥 세상으로 나왔는데 

제일 처음 아기한테 가해지는 행위가 구타라니요


엄마와의 상봉도 잠시 곧이어 인큐베이터로 옮겨지면서 엄마와의 생이별...

뭔가 다른 방법은 없는지 궁금해집니다.

 

아기가 세상에 나오면 모든 것이 새롭기 때문에 사물 하나 하나가 모두 배움의 재료입니다

이때 아기의 감각기관 입이 제일 먼저 발달한다고 합니다


뭐든지 손에 잡히는 물건을 입으로 가져가려는 행동을 하게 되는데 행동은 물건의 생김새를 파악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눈보다 입이 먼저 발달하여 눈의 역할을 대신해주기 때문에 아기는 입속으로 가져가서 물건들은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모습을 인지할 있다고 합니다


행동은 부모의 입장에서는 꺼려지지만 아기의 인지능력을 발달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없이 허용해야 같습니다

아기의 행동도 리비도라는 개념으로 해석하려고 했던 성욕구불만자 프로이트는 반성해야 같습니다.

 

아기에게 새로운 장난감을 주고 이를 지켜보는 엄마들의 반응을 알아보는 실험이 있는데요.

아기는 장난감을 어떻게 가지고 놀아야 몰라서 이렇게 돌려보고 저렇게 돌려보고 있는데 우리나라 엄마들 다수가 아기에게 이렇게 가지고 놀아야지 하고 가르쳐주더랍니다


우리나라 엄마들 소수와 외국의 엄마들은 아기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고요

노는 방법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은 아기들은 금새 장난감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고 다른 장난감을 찾고 그냥 엄마들이 지켜보기만 아기들은 장난감에 대해서 흥미를 잃지 않고 자기식대로 계속 가지고 놀더랍니다.

 

실험이 시사하는 바는 아기의 주체성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엄마들 다수는 아기가 제대로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를 바래서 아기의 흥미와는 상관없는 방식으로 아기의 주체성에 간섭을 것입니다


방식이 아기에게 강요되면 아기는 장난감에 대한 흥미 사물과 세상에 대한 흥미를 점점 잃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자존심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중적인 잣대는 아이의 정서와 가치관 형성에 혼란을 초래합니다. 


경험이 짧아서인지 몰라도 저는 아직까지 자존심 사람치고 정서가 안정적인 사람들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자존심 항상 외부로부터 지켜줘야 하는 사람의 약점같은 것이라서 약점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이용해서 외부 환경에 대응하기 때문에 외부 환경의 변화에 따라 

감정의 기복이 하루에도 번씩 변합니다


다혈질적인 성격이 되는 것이죠.

여기에 급한 성격까지 결합된다면 최악의 조합이 완성됩니다.

 

아이는 태어나 자라면서 겪는 일들 대부분이 생애 첫경험입니다

이런 저런 시행착오 끝에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는 과정에 있다고 있는데요


과정은 피라미드와 같아서 기초부터 시행착오를 차곡차곡 쌓아서 피라미드 정점의 뽀족한 부분에서 최선의 방법을 도출해내야 수천년이 지나도 굳건하게 버티는 피라미드처럼 

현실에서 안정적인 선택을 있습니다.


그러나 자존심 세면서 급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아이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최선의 방법을 찾아낼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시행착오를 시간낭비라고 생각해서 아이가 최선의 방법만 도출하기를 기대합니다

이것은 앞서 서술한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이의 방식에 대해 직접 개입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합니다


아이가 세상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잃는데 하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성찰이 부족할수록 자신의 감정이 지금 어떤 상태이고 원하는 감정으로 전환하기 

위해서 필요한 행동이 무엇인지 모르고 무작정 감정에 끌려다니게 됩니다


그리고 감정의 변화의 원인을 자신의 내면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외부 환경에서 찾는다면 외부의 환경에 대해서 일종의 피해의식이 생겨나게 됩니다.


피해의식은 새로운 환경과 사람들을 예전의 환경과 사람들로 환원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은 앞서 서술한대로 환경과 만나는 사람들이 바껴도 사람이 겪는 문제는 계속 반복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결국 자존심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의 불협화음을 줄이는 방법은 이미 겪었던 혹은 지금 겪고 있는 감정적인 문제들의 원인을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자신이 타인에게서 받은 상처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타인에게 상처에 대해서 타인과 입장을 바꿔 가슴으로 느껴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자존심 세면 셀수록 과정은 쉽지 않습니다.

자존심 갑옷이 두꺼우면 두꺼울수록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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