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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낮잠

나에겐 해묵은 감정들 몇 가지가 여전히 남아 있는데 오늘은 그 중 하나에 대해서 얘기해보려 한다.

 

아마 이것은 초등학생 무렵부터 시작되었지 싶다. 추측이나 예상을 나타내는 부사로 문장을 시작함은 강산이 몇 번 바뀌는 동안 점차 퇴색되어진 나의 기억력때문이다. 

어쨌든 난 늙어가고 있으니까...


나에겐 두 살 터울의 동생이 둘 있는데 그 중 막내에 관한 얘기다.

막내 동생은 어릴적부터 울음이 많았다. 

당시 우리집 형편은 아주 안 좋아 어머니도 생활전선에 투신하셔야 했는데 어머니가 일 가시면 

막내는 내가 학교에서 돌아올 때까지 두 시간 정도 혼자 있어야 할 때가 가끔 있었는데

집에 돌아오면 혼자 울고 있는 막내가 나를 맞아주는 경우가 종종 있곤 했다.

 

첫째 동생 얘기는 잠시 접어두자. 

글을 쓰는 지금 내 기억의 필름을 아무리 돌려봐도 당시 장면에서 첫째 동생이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오늘 점심 메뉴는 아일랜드 산 크로우고기였다.

 

각설하고 어느 날 학교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 있었다. 

갑자기 둘째 동생이 울음을 터트리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그 녀석의 조용히 읆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내가 비키라고 했잖아?"

 

동생과 그 녀석은 그네에서 좌우로 두어발 정도씩 떨어져 있었고 그 찰나 움직이는 것은 아무도 타고 있지 않은 그네뿐이었다.

난 순식간에 그 일의 추이를 파악했다. 

그 녀석이 빈 그네를 자기쪽으로 당겼다가 놓으면서 반대편에 있던 내 동생이 그 그네에 머리를 맞았던 것이다.

 

몇 가지 생각들이 깜깜한 어둠을 한순간 환하게 만들었다 사라지는 번개처럼 내 해골을 강타했다.

한가지 생각은 저 녀석에서 복수의 응징을 해줘야 해. 

내 동생이 당한 고통의 몇배로 되돌려줘야 해. 

다른 하나는 저 녀석은 덩치가 크고 상급생도 만만히 보지 않는다던데...

나만 흠씬 두들겨 맞는게 아닐까?

 

전자를 선택했으면 이런 회환이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 순간 난 동생을 지키지 못한 겁쟁이가 되고 만다.

전장에 나가기도 전에 패잔병이 된 내가 상처입은 내 동생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단지 꼭 껴안고 

아무 효험이 없다는 것을 아는 민간요법임에도 불구하고 동생머리에 호하고 내 입김을 불어주는 것 뿐이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 일은 내 유년의 기억과 함께 내 의식의 구석진 곳으로 강물처럼 흘러갔다.


그리고 오늘...

어제 배송되어진, 몇 년 전부터 소장하고 싶었던, 무지막지한 크기에 형형색색의 편집으로 당시 보는 순간 내 숨을 턱 멎게 했던 책을 가슴에 품고 흡사 압사한 듯 나는 낮잠에 빠져들었다.

 

배경은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였는데 어찌된 일인지 내 동생들과 함께 학교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를 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동생들과 나는 각기 다른 고등학교를 나왔다.)

비가 많이 오는 저녁이었는데 내 볼에 닿는 비의 감촉이 현실처럼 느껴질만큼 생생했다. 

막내동생은 기분이 좋은지 연신 돌아다녔다.

 

 비가 많이 와서 운동장에 개울이 하나 생겼는데 막내동생이 내 앞을 가로질러 그 개울을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 그 개울을 건너기 위해 폴짝 뛰었는데 공중에 뜬 발이 땅에 닿을 때쯤 그 땅이 함몰하며 개울로 변하는 것이었다.

막내동생의 몸 전체가 개울로 빠져들었고 동생의 괴로워하는 얼굴을 보고 나도 덩달아 뛰어들려는 순간 오른발이 땅에 뿌리박힌 듯 꿈쩍도 않는 것이었다.

 

혼자 안절부절 못 하는 사이 갑자기 물속에서 빨간색 옷을 입은 거대한 덩치를 가진 물체가 나타나더니 내 동생을 구해 주었다. 

그제서야 어영부영 정신을 잃은 동생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때 살면서 이제까지 느꼈던 그 어떤 것보다 더욱 격렬한 감정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내 목을 긋는 것 같았다.

검붉은 선혈대신 끝모를 슬픔이 베어져 나왔다. 

나는 그것을 땅바닥에 울컥울컥 끝없이 토해내었다.


"신이시여, 제발 안 됩니다!! 시키는대로 다 하겠습니다!! 제발 제 동생만은 안 됩니다아!!"


막내동생 입에 숨을 불어넣고 불룩해진 가슴을 누르며 미친놈마냥 절규했다.

 

내 절규의 응답이었는지 모르겠지만 한옴큼 물을 두어번 토해내면서 동생이 눈을 떴다. 

그 순간 동생을 잃을 뻔했다는 두려움에 미친듯이 울었고 

잠에서 깨어보니 눈가가 눈물에 젖어 있었다.


2011. 11.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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